<장기(長崎) 부근의 조선 촌> 1922년(다이쇼 11년) 6월 8일 자 동아일보

당시의 하시마의 모습이 기록된 동아일보 특파원 기사. “여기서 수백엔 돈을 모으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가 많다”라는 하시마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무자의 증언이 자세하게 보도되어 있다.

동아일보(1922<다이쇼 11> 68일 자)

 

자료제공:국립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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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에서 일하고 바다에 잠자는

500여 명의 조선 노동자의 살림

장기(長崎)부근의 조선 촌

조선사람 로동자를 오백여 명이나 사용한다는 삼능 탄광회사(三菱炭鑛會社)의 상황을 보고자 기자는 어느날 오후에 장기시외 고도촌(高島村)을 향하얏다. 배를 타고 조선리수로 오십리쯤 나아가면 수목이 무성한 섬에 탄광 굴뚝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오른다. 이곳에는 조선인이 대략 일백칠십 명 가량이나 사는대 그들은 모다 회사집에 수용되얏슴으로 별로집으로 근심하는 일은 업고 하로 잘 벌면 이円의 삭전을 밧는대 먹기는 회사에서 공동으로 밥을 지여 실비 사십젼을 밧고 먹이고 의복은 로동자이닛가 별로 돈이 들지아니하야 당자만 잘하면 돈을 모을 수 잇슴으로 이곳에 온지 이 삼년동안에 오륙백円의 돈을 버러 고향으로 보낸 사람이 잇다 하며 로동자 중처자까지 다리고 온 사람은 그아들들을 현재 심상소학교에 입학식히엇다는대 성적이 매우 좃코 특별히 어학의 재조가 잇서 십여세의 어린 아해가 일본말을 류창하게 함으로 자기 어머니의 통역을 하야 준다한다 고도촌에서 잠간만더가면 이자도촌(二子島村)이라는 섬이 잇는대 이곳에도 조선인 항부(坑夫)가 근 이백 명이 잇스나 생활 상태는 전기 고도촌과 틀님이 별로 업고 그곳에서 대략 조선 리수로 십리가량을 더 나가면  총평수가 일만여평쯤 되는 적은 섬이잇스니 이곳이 단도(端島)라한다 이곳에도 조선인이 일백팔십여 명이나 사는대 낫이면 깁히가 백여길이나 되는 석탄구덩이속에 드러가서 일을 하고 밤이면 회사집에서 자며 그중에는 살님을 따로 하는 사람도 몃 집이 잇서서 이곳에서는 어더볼 수 업는 조선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 부인이 구석구석에서 밥을 짓고잇다 낫이면 삼백척이나 깁흔 흙구덩이속에 드러가서 생명이 위태한 석탄캐기로 일을 삼고 밤이면 망망대해의 물결소래만 처량히 들니는중

타향사리를 하는 그들의 감상은 엇더한가 그중 엇던 사람의 말을 드르면 타향에 세월이 지리하다 하야도 우리에게는 엇지 그리 빠른지요. 내가 조선서 온지가 엇그제 가튼데 어늬듯 륙년이 되엿슴니다. 조선도 아마 만히 변하엿겟지요. 학교가 만히 이러난다지요? 학생이 만하젓다지요. 때때로 오는 고향 친구의 편지를 보면 매우 반가운 소식도 만하요. 이곳에서는 제가 힘드려 일만하면 먹기때문에 걱정하는 일은 업고 조선 잇슬때에는 경찰관의 학대에 견댈 수가 업더니 이곳은 그러치는 안슴니다. 자식은 모다 심상소학교에 보냇슴으로 일본말은 잘하지마는 조선말은 모름으로 집안에서는 되도록 조선말을 쓰게 하옵니다. 삭전은 이円을 버는 사람은 석탄 구텅이속에 드러가서 일을 하는 것이요. 밧게서 일하는 사람은 일円이 삼십銭 밧게 벌지 못함니다.

이곳에 온 사람은 경상남북도 사람이 뎨일 만코 그 다음은 전라남북도 그 다음은 충청도이요. 경기도사람은 매우 적슴니다. 이곳에서 몃 백円만 돈을 모흐면 곳 고향으로 도라가는 이가 만슴니다”한다. 아모리 생활 곤난으로 오기는 하얏스나 낫이면 토굴속에서 일하고 밤이면 가업는 바다의 물결소리만 처량히 들니는 중에 덧업시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는 그들의 얼골에는 모다 일종 말로는 형용할 수 업는 처량한 빗을 띄웟더라. (장기특파원)

 

 (1922년(다이쇼 11년) 6월 8일)